“누가 나 좀 말려줘요”
의류 회사에 다니는 L 씨는 툭하면 화장실에 달려가 손을 씻는다. 비누칠을 꼼꼼하게 한 다음 씻기를 여러 차례 하고서야 손을 닦는다. 다른 사람과 악수를 하고 나서도, 서류 정리를 하거나 돈을 만지고 나서도 손을 씻으러 간다. 너무 씻어서 손이 짓무를 정도가 됐지만 나쁜 균이 묻었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아 어쩔 수가 없다.
씻고, 확인하고, 셈하고... 강박증
D 씨는 어깨에 벌레가 묻은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습관이 있다. 머릿속으로는 터무니없는 생각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하루에도 수십 번씩 ‘벌레’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아 어깨를 털어내는 동작을 되풀이한다. J 씨는 엘리베이터 안에만 들어서면 불경스러운 생각이 들어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엘리베이터를 타러 갈 때는 1에서 10까지 숫자를 앞뒤로 1 백번씩 세고 탄다.
이들은 모두 일종의 불안장애 질환으로 분류되는 강박장애 증상을 보이고 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좀 유난스러운 정도겠지만 실제로 본인은 상당히 고통스럽다. 한 가지 생각이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맴돌아 다른 일을 할 수 없으니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다.
강박장애와 결벽증은 다르다
강박장애란 특정한 생각이나 느낌이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강박사고(obsessive thought)’와 ‘강박행동(compulsive behavior)’을 되풀이하는 증상을 말한다.
환자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어떤 특정한 생각이나 행동이 계속 반복되는 상태가 하루에 1시간 이상 적어도 2주일 이상 계속되고, 환자가 이로 인해 고통받고 생활에 지장을 받을 때 강박장애라는 진단을 하게 된다. 강박적 사고는 계속되는 관념, 사고, 충동, 심상을 말하며, 환자들은 이런 생각이 자신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고 강요당한 듯하고 부적절하다고 느껴 심한 불안과 고통을 호소한다.
가장 흔한 강박적 사고들은 오염(예: 악수할 때의 오염)에 대한 반복적 생각, 반복적 의심(예: 교통사고를 내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문을 잠그지 않은 채 그냥 나오지 않았는지 궁금해함), 특별한 순서로 물건을 정리하고 싶은 욕구(예: 물건이 무질서하거나 정돈되어 있지 않을 때 받는 강한 고통), 공격적이거나 두려운 충동(예: 아이를 해치거나 교회에서 음담패설을 늘어놓음), 그리고 성적인 생각(예: 반복되는 호색적 상상) 등이 있다. 이런 강박사고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누구나 하기 마련인 돈, 일, 학교문제를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과는 다르다.
또 강박장애는 단순한 결벽증세와도 구별된다. 이를테면 속옷을 매일 갈아입는 사람이 하루나 이틀쯤 이를 걸렀을 때, 결벽증은 찝찝함·불쾌함을 느끼는 정도라면 강박증 환자는 하루종일 불안해하면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수준이다.
“강박장애 환자의 상당수가 매우 심한 결벽증세를 보이게 마련이지만 결벽증은 상대적으로 한가지 일에 집착하는 정도가 심한 성격상의 문제이기 때문에 병적 질환으로 볼 수는 없다”라고 전문의는 설명한다.
본인도 강박장애를 인정하지만...
강박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대개 그런 사고나 충동을 무시하거나 억제하려 하고, 다른 사고나 행동(강박적 행동)을 해서 없애려고 한다. 가스불을 껐는지 계속 의심하는 사람은 밸브를 계속 확인하고 손에 병원균이 묻었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은 손을 씻음으로써 강박사고를 없애려고 한다는 얘기다.
강박적 행동은 반복적인 행동(손씻기, 정돈하기, 확인하기)이나 정신적 활동(기도, 숫자세기, 마음속으로 단어 반복하기)을 함으로써 불안이나 고통을 방지하거나 줄이려고 하는 것이지 기쁨이나 만족을 얻기 위한 행동은 아니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강박적 사고에 따르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또는 어떤 두려운 사건이나 상황을 미리 막기 위해 강박적 행동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낀다. 이런 행동들은 확실하게 지나친 행동이고 강박사고를 없애기 위한 것이라고 하기에는 현실성이 없다.
강박장애를 보이는 사람들은 대개는 자신의 사고나 행동이 지나치거나 불합리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그 통찰력의 정도는 매우 다양하다. 같은 사람이라도 강박증에 대한 인식은 시간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토론할 때는 오염에 대한 강박적 행동이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인식하던 사람이 돈을 만질 때는 또다시 병원균 때문에 괴로워한다. 이처럼 강박적 사고와 행동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대부분의 환자들은 이에 저항하려고 한다.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을 억제하려고 할 때는 불안이나 긴장을 겪게 되는데 흔히 이런 불안은 강박적 행동을 다시 시작하면서 누그러진다.
그리고 이런 경험이 반복되다 보면 환자들은 더 이상 저항하려고 하지 않고 거기에 굴복하고 만다.
강박사고나 행동은 심한 고통을 가져오고 시간을 낭비하게 하고(하루 1시간 이상) 정상적인 일과, 직업 활동, 또는 일반 사회활동이나 대인관계에 심각한 장애를 가져온다. 강박장애 증상 때문에 마음이 산만해져 독서나 컴퓨터 조작처럼 집중을 필요로 하는 일을 할 때는 효율성이 떨어진다. 정도가 심해지면 아예 강박장애가 오는 상황을 피하려고 집안에 틀어박혀 지낼 수도 있다.
강박장애는 드문 질환이라는 예전의 생각과는 달리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의 2∼3%가 유병률 보이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2∼3% 정도인 것으로 조사됐다. 미국에서는 공포증, 주요 우울증, 약물장애 다음으로 흔한 질환이다.
남녀의 발생 비율은 비슷하지만 사춘기에서는 남자가 더 많고 남자가 여자보다 약간 더 이른 나이에 증세를 보인다. 환자의 2/3는 25세 이전에 발병하고 15% 미만은 35세 이후에 발병한다. 2세 정도의 어린이도 강박장애를 앓을 수 있으며 기혼자보다 미혼자가, 흑인보다 백인에게서 더 많이 나타난다. 임신 중이거나 출산하는 사람의 40% 정도에서 강박증상이 나타난다는 보고도 있고 출산 후 산욕기에 생기는 감정의 이상으로 강박증상이 나타난다고도 한다. 의사들은 이를 임신 중에 일어나는 호르몬의 변화가 세로토닌 신경계에 영향을 주어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전문의는 이런 특성을 강박증에 대한 환자들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한다.
“환자들은 대개 자신의 강박적 사고와 행동이 비합리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없애려고 강박적 행동을 합니다. 또 자신의 강박현상이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려 이 사실을 숨기기 때문에 주위에서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합니다.”
강박증세가 생기면 처음에는 나름대로 자신만의 방법으로 노력을 많이 한다. 강박적인 생각이 들 때는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하고, 아예 생각을 안 하거나, 주문을 외우는 등 많은 방법을 동원해 보지만 대개는 실패하고 만다.
자연 병원을 찾는 시간이 늦어지고 그때는 상태가 많이 나빠져 치료 기간도 길어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강박장애는 일반적인 불안장애, 주요우울증, 건강염려증, 특정공포증과 비슷한 사고를 보이기도 하고 행동을 하기도 하지만 이들 질환과는 다른 것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전에는 강박장애를 심리적으로 해석을 했다. 프로이드는 어린아이가 대소변 가릴 나이에 부모한테 지나친 훈련을 받으면 커서 강박장애 증상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 초자아(슈퍼에고)와 욕망(이드)의 균형이 적절히 맞아야 되는데 지나치게 슈퍼에고가 강한 사람은 그 불균형 사이에서 오는 갈등 때문에 강박장애를 일으킨다는 설명도 상당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 사람의 뇌를 들여다볼 수 있는 방법이 점차 많이 생겨나면서 강박증의 원인은 새롭게 밝혀지기 시작했다. CT를 비롯해 MRI(자기 공명영상), PET(양전자 방출 단층촬영) 같은 의학기계들은 뇌를 해부학적으로 들여다보고 혈류량까지 파악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런 기기들로 살펴본 결과 강박장애를 보이는 사람들에게서는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이나 도파민이 부적절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또 뇌의 전두엽과 기저핵 등에 대사와 혈류가 증가했다는 보고가 있다. 이밖에 일란성쌍둥이를 상대로 한 관찰결과 유전적 요소도 크게 작용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외에도 강박장애 환자의 뇌에서 이상뇌파가 우울증 환자보다 훨씬 많이 나타난다는 보고도 있다.
일반적으로 강박장애의 1차적 치료는 약물치료와 행동치료를 기본으로 한다. 강박장애 치료에는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를 사용한다. 약물은 대개 초기에는 적은 양으로 시작해 증세가 좋아지지 않으면 점차 많은 양을 투여한다. 병이 호전돼 약물을 끊을 때는 금단증상을 막기 위해 서서히 용량을 줄여 나간다.
△강박관념만 있고 행위가 없거나 △비교적 사회 적응성이 좋은 경우 △그럴만한 특별한 요인이 있는 경우 △강박증이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경우 등은 약물치료만으로도 좋은 치료효과를 보인다. 병원에서는 거부하는 환자를 제외한 모든 환자에게 약물치료와 함께 인지-행동요법(CBT)을 권하고 있다. 특히 약물만으로는 효과가 없는 환자, 약물치료에 부작용이 많은 환자, 다른 정신질환을 같이 앓고 있는 환자에게 이를 적용시킨다. 인지-행동요법은 단순한 강박장애일 경우 대개 13∼20주 동안, 1주일에 1번 정도로 시작하고, 3∼6개월 동안 1 달마다 유지요법을 써야 한다.
강박장애는 일반적인 불안장애, 주요 우울증, 건강염려증,
치료결과가 좋은 경우에도 재발을 막으려면 유지요법이 필요하다. 강박증상이 완전히 좋아지더라도 6개월 이상은 적어도 1달에 1번씩 병원을 찾는 것이 중요하며 약물이나 인지-행동요법을 적어도 1년 이상은 계속해야 한다. 특히 인지-행동치료에 효과를 보지 못한 환자는 약물을 중단했을 때 재발할 확률이 높다고 한다. 3∼4번 이상 재발한 환자는 경우에 따라 장기간의 치료를 해야 하고 심하면 평생 동안 치료를 해야 한다. 전문의는 “유지요법이 성공적인 경우 서서히 약물을 줄이는 것이 아주 중요하고 초기에는 약물을 25% 정도 감량하고, 약 2개월간 기다렸다가 다시 감량을 시도하는 것이 좋다”라고 말한다.
이외에도 집단치료가 도움이 될 수 있고, 가족들을 지지하기 위해 가족치료가 필요할 때도 있다. 치료에 반응하지 않는 심한 환자에게는 전기충격요법이나 정신외과수술(psychosurgery), 즉 대상회전 절개술(cingulotomy)을 고려해 볼 수도 있다. 정신외과수술은 30∼40%의 아주 심한 환자에게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전문의들은 치료가 어렵다는 과거의 통념과는 달리 대부분의 강박장애 환자는 약물치료나 행동요법으로 좋아질 수 있다고 얘기한다. 약물요법만으로 약 58%의 환자가 좋아졌고, 12주간의 치료로 적어도 약 85%에 이르는 환자들의 상태가 아주 좋아졌다고 한다.
이처럼 치료가 어렵다는 과거의 통념과는 달리 대부분의 강박장애 환자는 약물치료나 행동요법으로 아주 높은 치료효과를 보고 있다. 강박적인 자신의 생각이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잘 고쳐지지 않아 고통받고 있다면 서둘러 병원에 달려가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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